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달라이 라마 13세 (문단 편집) === 첫 번째 망명 === 1904년 8월, 영국은 티베트가 자유통상을 거부하고 이전의 조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2차 침공을 해왔다. 물론 실제 목적은 티베트와 러시아의 결속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프랜시스 영허스밴드 대령이 지휘하는 1150명의 영국군이 라싸로 접근하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수백 명의 고관들과 함께 몽골의 [[울란바토르|우르가]]로 피난하였다. 청나라는 거의 손도 쓰지 못했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경의를 표하며 많은 제물을 바쳤다. 백성들이 자기가 아니라 달라이 라마를 더 존경하는 것을 본 몽골 라마들의 수장인 [[복드 칸]]이 분노를 표출하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몽골 왕공 칸다 도르지의 초청으로 수도 외곽으로 떠났다. 외몽골 체류 시기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러시아가 티베트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득이 없었다. 1905년, 달라이 라마 13세는 쿰붐사를 비롯한 여러 몽골의 승원을 방문한 후 [[광서제]]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했다. 하지만 광서제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 거절하고 [[서태후]]만 만났으며 달라이 라마 5세의 전례에 따라 주장대신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상주할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신정개혁과 [[개토귀류]]를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달라이 라마는 주중 미국 공사 윌리엄 로크웰 등과 회견했다. 또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 만난 것도 이 시기다. 1908년, [[선통제]]의 즉위식까지 지켜본 달라이 라마 13세는 3년에 가까운 베이징 체류를 중단하고 1908년 11월 베이징을 떠나 1909년 연말에 히말라야로 돌아갔다. 영국군은 1904년 영국-티베트 조약을 체결하여 50만 파운드의 배상금과 티베트-시킴 국경의 정리, 교역소 설치 등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기 때문에 진작 철수한 후였다. 이 협정은 청나라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서 이후 티베트가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시 영국은 1906년에 중국과, 1907년에 러시아와 티베트 관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이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청나라가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첫 번째 망명의 결과로 달라이 라마 13세는 영국에 줄을 대야 한다고 판단했고 영국의 힘을 빌려 자신이 없는 동안 청나라에서 단행한 개토귀류와 신정개혁을 철폐하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